공부/과학사통론12018. 3. 13. 21:01

과학사통론1 2주차 발제

Peter Pesic, Music and the Making of Modern Science





4장. Hearing the Irrational

 

무리수와 유리수를 합친 수 개념은 스타이펠, 카르다노, 비첸티노 세 명의 작업에서 드러난다. 16세기 수학자들은 전통적인 수/크기 구분을 극복하려 해왔다. 레코드는 책에서 무리수를 다루며 수의 개념을 넓혔지만 동시에 전통적으로 무리수를 거부하는 이름 표기를 사용했다. 수학자들은 실용적이고 이론적인 접근으로 수 개념들을 이어줬는데, 이를테면 비에테가 60진법 대신 무리수를 표기할 수 있는 10진법을 천문학에서 상용화할 것을 주장한 것이 있다. x 같이 문자 기호로 표현하길 주장하여 그는 무리수까지 포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다른 예술과는 달리 음악은 무리수 사용의 적법성을 뒷받침했기에 새로운 수 개념의 중재자가 될 수 있었다. 무리수를 명시적으로 언급한 초기 학자는 종교개혁에 참여한 신학자 스타이펠이었다. 그는 그의 책에서 옥타브가 전음의 정수로 나눠질 수 없으므로 음을 절반으로 나눠야 하며 이는 무리수의 도입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그는 음악적 요구가 수학적 비합리성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유클리드나 오렘이 유리수와 무리수 사이의 경계를 세워놓은 데 반해 스타이펠은 유리수를 사용해 무리수 비를 도출했다. 이는 기하학적 방법과 유리수 비를 결합한 최초의 시도이며 스타이펠은 이것이 유리수 비 만큼이나 명백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무리수의 본질을 말할 때 정밀성이 떨어진다는 등의 근거로 무리수는 진짜 수가 아니라고 했다. 무한에 대한 혐오가 기하학적, 음악적 주장을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하여간 스타이펠의 주장은 4과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카르다노의 음악 저술은 덜 알려졌지만 가장 유명한 수학 저술과 근접한 시기에 쓰였기 때문에 함께 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가 음악가였던 카르다노는 음악적 장식에 관심이 많았고 4분음에 애착을 가져서 반음을 연구했다. 음을 반음으로 정확히 나누려면 무리수 근을 필요로 한다. 그는 음악적, 지각적 근거로 유리수와 무리수를 동등하게 두며 무리수는 참된 4분음이고 유리수는 참된 산술이라고 했다. 그의 황금 규칙방법에서처럼, 참된 기하학과 참된 산수의 차이는 감각할 수 없을 만큼 작다. 음악은 지각적 양과 참된 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예시이다.

보에티우스에 따르면 멜로디는 각각 기초음계에 대응하는 3개의 속을 갖는다. 이는 온음계, 반음계, 4분음계인데, 이 중 온음계만 남아 있고 4분음계는 당시에 사용되지 않았다. 음악가였던 비첸티노는 4분음계가 고대 음악의 중요한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에 되살려야 한다고 믿었다. 1551년에 그는 한 공연으로부터 촉발된 대중 논쟁에 참여했다. 논쟁의 핵심은 당대 음악에서 고대적 속의 올바른 지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고 넓게는 우주의 진실성을 당대 음악이 지키고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바티칸의 추기경과 판사들 앞에서 주장을 펼쳤던 비첸티노와 루지타노의 논쟁은 비첸티노를 향한 비난이 담긴 판결로 끝을 맺었다. 가톨릭은 수학의 인식적 확신성과 교리의 기반을 훼손할 어떤 대안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후 비첸티노는 대중을 향해 항변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아키쳄발로라고 하는, 반음계와 4분음계를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만들었다. 이것을 조율하기 위해선 4분음의 음정을 정확히 결정해야 했기에 그는 고대 수학, 음악 이론가들을 연구했다. 당시엔 4분음을 정의하기 이전에 반음의 정의부터가 확정되지 않았었다. 장조와 단조 반음을 각각 장조와 단조 4분음으로 나누는 방법은 똑같은 문제를 계속 낳을 뿐이었다. 해결책은 고대에서 찾을 수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대체로 4분음이 일종의 최소 단위처럼 작아서 정의하기 어렵다고 믿었다. 4분음을 물질적으로 발하는 것도 악기 아울로스로 음을 꺾는 것과 같은 기교를 필요로 했다. 이 말처럼 4분음이 비율로 표현되지 않는 기교라면 음조(인토네이션)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제누스는 이런 입장에서 음계를 세분화하는 것이 무리수 양을 낳기 때문에 우리가 (이성이 아닌) 귀로 얻는 감각을 근거로 음계가 유리수라 하는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리수와 무리수의 구분이 서로에게 상대적이며 공약불가능하다고 한 유클리드와는 달리, 아리스토제누스는 온음과 반음이 4분음을 단위로 하여 만들어진다고 주장함으로써 공약불가능성을 무시했다. 우리가 음계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로서 공약가능해야 한다.

경험에 대한 비첸티노의 강조는 음악이 유리수에 관한 낡은 주장을 극복하기 위한 근거라는 의미였다. 4분음은 무리수이므로 음계가 나눠진다는 주장은 기하와 산수의 전통적인 구분을 거부했다. 이런 의미에서 비첸티노는 기하적 무리수로 만들어진 음계를 (유리수 비율의 단위이기 때문에) 산수에 편입시켜 긍정적으로 다룬 첫 인물이다. 이 주장의 본질은 그 양가적인 면이다. 4분음계가 존재한다는 비첸티노의 전제야 고대 자료에 의해 증명된 것이므로 역설적 측면은 당연히 존재해야 한다. 그가 말하길, 이 켄타우로스는 케이론처럼 현명한 자이다.

온음계의 반음과 관련한 문제는 그 반음이 정확히 절반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장조와 단조 반음을 나누는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다. 반음계의 반음은 장조일까, 단조일까? 이 문제로 인한 불안정성을 해결할 방법이 4분음계의 존재를 통해 온음계와 반음계 모두를 이치에 맞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무리수 크기를 유리수 비와 같은 의미의 존재를 갖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음악은 (무리수 비 같은 혼종 개념으로) 산수와 기하를 만나도록 하는 중개자였다.

스타이펠, 카르다노, 비첸티노의 수학적 관점은 음악적 실천에 영향을 미쳤다. 스타이펠은 음악 이론을 다루며 무리수를 실재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의 무한성이 참된 수로 인정하기 어렵도록 만들었다. 그의 주된 음악적 실천은 신교를 전파하기 위한 음악 하나를 만든 것인데, 그것의 멜로디는 새롭지 않았다. 그에겐 비첸티노와 비견될 만한 음악 개혁의 야심이 없었다. 카르다노가 작곡한 음악은 스타이펠보다 조금 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비첸티노가 그의 후원자를 찬미하며 만든 노래는 마지막 절이 4분음계로 만들어져 그것에 추기경의 권위와 신성을 부여하려 했다. 비첸티노는 온음계가 공공장소에서 대중을 위해 사용되는 것과 반대로 4분음계는 위대한 명사의 훌륭한 취향을 위해 연주된다는 식의 설득을 시도한 것이었다. 이것은 그의 이론이 널리 전파되어 사후 그의 후계자들이 정당성을 입증하도록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무리수 비율 개념은 논쟁에 시달렸다. 아르투시는 조율 기구의 기하학적 구조를 받아들이면서도 성악에 무리수 비를 도입하는 것은 망설여 했다. 그는 몬테베르디가 무리수 비를 적용한 것이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했다. 류트로 이러한 부자연스러운 음계를 연주하는 것이야 가능할지도 모르나 인간의 자연적 목소리는 그것에 적합하지 않다. 이러한 논쟁적 분위기 속에서 스타이펠은 전통적 음악에 머물렀고, 카르다노와 비첸티노는 무리수를 음악에 효과적으로 적용했다. 이 세 명이 수를 넘어선 것으로 음악을 나타내려 했던 시도를 통해, 산수가 대수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음악가가 중요한 동반자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è  무리수를 적법하게 만든 것은 음악적 고려인데, 여기 나타난 세 명이 무리수를 선택한 이유가 순수하게 이론적인 것일까? 이론적 근거는 그들의 선택을 과소결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무리수를 선택하도록 한 외부적 이유, 이를테면 역사적 이유가 존재할까?

è  여기서 등장하는 온음, 반음, 4분음의 문제가 사후적 관점에서, 즉 현대 음악에서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6장. Descartes’s Musical Apprenticeship

 

데카르트의 음악적 성과는 물리학이나 우주론과 관련이 있지만 그것들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전쟁터에서 친구였던 베크만에게 <음악개론>을 선물했다. 베크만은 신학을 공부했던 자로, 과학과 수학을 독학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어떤 책도 출판하지 않았지만 관성의 원리를 생각하고 중력을 작은 입자들의 힘으로 설명했던 선구자였다. 그는 데카르트를 게으름에서 깨어나게 해주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이 천체의 운동처럼 불변하는 운동에나 적용되지 물리학에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은 혼합된 수학이란 표현을 써서 물리적 문제에 수학을 사용하려 했고, 메르센도 유사한 주장을 했으며, 데카르트와 베크만은 메르센에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였던 <음악개론>은 르네상스기 음악 이론에 치우치긴 했으나 신구의 근사한 조합을 보여준다. 간결한 첫 문장, “(음악의) 목적은 소리이다는 음악을 성스러운 힘에서 물리적 현상으로 변화시킨 과학혁명을 요약하는 말이다. 반대로 이 책이 이후 그의 새로운 자연철학의 형성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음악은 수학과 물리학을 조화시키려는 계획의 완벽한 예시였다. 소리로서의 음악은 경험적 차원에서 감정의 고양을 목표로 하며, 흥분의 정도와 같이 관찰 가능한 징후들로 이어진다.

기쁨은 대상과 감각 사이의 비례적 관계, 즉 기하학적 크기이다. 감각은 부분 간 차이가 작고 비율이 클 때 대상을 더 잘 지각한다. 이 비율은 산술적이어야 한다. 산수가 비합리적인 기하보다 더 쉽게 지각되기 때문이다. 음악은 기하학적 비율보단 산수에 의존해야 한다. <음악이론>에서 그는 수학적 음악이라는 고대적 요소와 당대의 수학적 물리학을 결합한다. 박자의 경우 단순한 비율일수록 잘 지각되며, 멜로디도 마찬가지로 전체가 부분들의 합으로 지각되는 순간까지의 과정이다. 다양한 박자가 일으키는 다양한 감정적 반응이 우리가 수를 느끼는 방법이다. 류트를 뜯는 것을 관찰하며 데카르트는 이후 배음이라 불리는 현상을 발견한다. 이는 옥타브 사이의 관계가 순수 수적 관계라는 고대의 관점을 물리적 관계로 바꾼 성취이다.

<음악이론> 이후 음악에 대한 데카르트의 언급이 나타나는 것은 메르센과의 첫 편지이다. 그는 화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묻는 것으로 시작하고, 잡다한 주제들이 편지들로 오간 뒤 다시 음악적 주제를 언급하는데, 당대 음악 실천에 친숙해 보인다. 이 다음 단락에서 데카르트는 어떻게 진자가 진공 속을 움직일 수 있겠냐는 메르센의 물음에 답한다. 데카르트의 계산은 전통적인 음악의 비율에 의존한다. 이를 두고 데카르트의 자연철학을 위한 수학적-경험적 공간을 음악이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 편지에서 그는 류트 실의 운동에 대한 메르센의 질문에 답하며, 모든 자연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는 진자와 실이 평형 지점에서 오간다는 점에서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실의 진동이 가라앉는 과정은 음악적 수를 따른다. 다음으로 실이 공기의 저항 때문에 점점 속도가 느려질 것이라고 하다가 반대로 공기가 원운동을 하는 실을 도울 수도 있겠다며 전통적인 관점으로 언급한다. 이는 본래 음악 이론에 의해 산술적으로 다뤄졌던 주제를 물리학-수학으로 만들려는 갈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그는 실이 느려졌는지를 귀로 확인할 수 있다고 하며 음악적 경험의 영역으로 돌아온다.

다음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다른 자연철학이 용납될지를 우려하며, 상상적 세계에 대한 기술로 가장한 자연철학을 제시할 조짐을 보인다. 갈릴레이의 <대화>가 프랑스에 닿기도 전이었다. 이때 데카르트는 자연의 모든 현상을 규명할 체계적, 수학적인 법칙을 구상하는 중이었고, 그의 편지들에서 생성 중인 사상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다시 음악적 주제로 돌아와서 멜로디가 오르내리는 것에 의해 음계들이 결정된다는 주장을 한다. 또 저음이 연장된 물체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고음보다 더 멀리 나간다고 하며 연장 개념의 초기 형태를 드러낸다. 이후 다시 낙하하는 물체와 실을 관련 지어 논한다. 이런 모습은 그에게 음악과 물리학의 문제가 개별적인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또 고대 그리스의 음악에 대해 논하기를, 당시의 음악이 더 나은 까닭이 질서로 가득한 온음계 음악에 지배되지 않고 상상력에만 의존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소리의 본성을 전통적인 펄스 이론으로 언급하며 편지를 마친다.

한참 뒤의 편지는 고음의 소리가 더 빠르기 때문에 높은 음이 더 많이 진동한다고 쓴다. 따라서 두 소리는 충돌 시 진동을 더 많이 일으키고 불균등이 덜할 때 더 조화로운 것이다. 현대의 주파수 개념과 유사한 주장이다. 이때 데카르트가 주석을 통해 조심스럽게 진동을 정의하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은 향후 파동론에서도 공기의 진동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라는 문제로 중요하게 다뤄진다.

진공에 관한 논의에서, 데카르트는 처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와 같이 진공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음악-물리적 고민으로부터 나타난 것이다. 빛을 다룬 텍스트에서 그는 감각되는 모둔 대상을 논하는데, 이 중 소리가 중요한 요소이다. 소리는 마치 촉각과 같아서, 확실해 보이지만 그 감각을 일으키는 대상과 무관한 것을 상상하도록 한다. 소리에 대한 데카르트의 이해는 빛을 가분적인 연속적 유체로 파악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용되었다. 소리가 연속적인 매체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텅 빈 장소는 있을 수 없다. 그는 작은 공이 붙어 있는 모델을 사용하여 소리와 빛의 이동을 설명한다.

이 유체 세계는 행성의 움직임을 소용돌이를 매체로 한 운동으로 설명할 때도 사용된다. 코페르니쿠스를 따라 태양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오고, 실제 행성들의 움직임처럼 소용돌이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속도는 빨라지게 된다. 이런 모델은 갈릴레오나 케플러의 것보다 일관성 있는 우주론이었다. 또한 태양과 태양계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중심이나 끝이 없는 모습으로 그린 것도 뛰어난 점이었다. 그러나 갈릴레오의 사건을 들은 그는 자신의 우주론을 숨겼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발표했다. 이후 데카르트의 철학에 음악이 관여된 적은 거의 없어졌다. 태양이 별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태양계의 조화에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는 우주의 조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우주의 음악을 반박할 다원성으로 이끄는 딜레마의 한 모습이다.

 

è  이 절은 대단히 산발적인 단서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데카르트도 당시 당연하게 여겨졌던 생각을 따라 음악적 조화에 관심을 보인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음악이 그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까? 여기에 서술된 것만을 보면 그가 음악과 수학과 물리학을 총체적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음악적 요소는 연관성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여전히 케플러 등에게서 음악이 갖는 중요성 만큼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è  책은 데카르트와 이전 학자들의 차이가 음악을 물리학과 연결하는가, 천문학과 연결하는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전과의 차이는 그 이상인 것 같다. 데카르트 이전 사람들은 수와 음계가 질서일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세계의 구성 요소라고 믿었다. 반면 데카르트에겐 그런 거창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차이는 무엇이 있으며 이러한 단절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Posted by loklokl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