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독서

Making Natural Knowledge Coda 발제

lokloklok 2018. 2. 23. 00:46

Jan Golinski, Making Natural Knowledge





Coda: The Obligations of Narrative

 

 

1

 

역사의 애매성은 인간 경험의 근본적인 조건이다. 리쾨르는 역사 서술의 형식과 인간 경험의 시간성 사이의 연관성을 제시했다. 역사 서술은 문자 그대로 보면 일어난 일을 쓰는 것이고, 상징적으로는 단순히 순차적으로 나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이 사건들을 의미 있는 이야기로 경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영어권에서는 화이트가 역사적 글쓰기를 연구했다. 그는 19세기 과학적 역사가들이 역사 담론의 내러티브적, 윤리적 의미의 측면을 지우려 한 시도에 반대했다. 화이트에 의하면 역사 담론이 생산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내러티브적 형식을 인지한다는 것과 같다.

고전적 형태의 과학사는 지식이 진보하는 이야기, 또는 진보에 유리한 개인적, 역사적 조건 등 인식론적이고 도덕적인 주장을 포함했다. 현대적인 과학사는 그것에 반대하는데, 그렇다면 과학사는 어떤 내러티브를 사용해야 할까? 이 질문은 역사가 학생들, 과학자들, 그리고 대중과 맞닿은 교육적 활동을 할 때 특히 중요하다. 독자가 듣고 싶어하는 내러티브와 과학사의 내러티브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과학의 진보에 대한 거시적 역사가 없어졌다는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심포지엄이 열렸다.

존 크리스티는 계몽주의적이고 선형적이며 현대를 목적으로 향하는 내러티브에 향수를 느끼는 흐름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20세기 중반까지의 실증주의, 칸트주의, 헤겔주의, 마르크스주의 등의 철학 조류가 일관된 정신적 진보라는 내러티브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Rouse도 크리스티의 관점을 공유하여 현대 과학철학 대부분이 역사를 모더니즘적인 내러티브, 즉 지식과 도덕과 정치와 부가 진보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고 분석했다. 반모더니즘 내터리브가 환경과 인간성의 파괴의 역사를 서술하지만 이것 역시 모더니즘적 틀을 반복할 뿐이다.

그러나 둘의 해결책은 다르다. Rouse는 포스트모던한 역사 서술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크리스티는 모던/포스트모던 이분법을 거부하면서 현대 역사기록이 거대서사를 배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과학에 대한 후기경험주의와 구성주의의 새로운 관점은 물질에 대한 제어, 사회정치적 권력 형성 등에 대한 거대서사를 가능하게 한다. Rouse에 의하면 그런 역사 내러티브는 모더니즘 담론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구성주의 사회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과학지식사회학자들의 과학사는 계몽주의 역사관의 틀에서 지주와 성직자의 자리를 과학자와 과학철학자들로 대체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전통적 인식론에 의존하고 있다. 또한 사회학자들이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을 믿음의 사회적 근거와 인식적 근거로 대체하는 것은 과학의 인식적인 정당성을 부정하기 위해 그런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실제로 콜린스 같은 구성주의 사회학자가 사회적 원인과 합리적 원인을 대치시키긴 했다. 하지만 다른 학자들, 이를테면 블루어는 그러지 않았다. 블루어가 합리성과 별개로 작용하는 사회적 원인을 파헤쳐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합리적 원인과 사회적 원인은 배타적이라기보단 공존하는 관계였다. 구성주의를 하나로 묶어서 비판하는 Rouse는 구성주의가 과학실천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방식을 무시한다. Shapin Schaffer는 자연적 지식과 사회적 지식의 경계가 그어지는 과정을 설명했고, 재귀주의자?는 재현과 논증이라는 과학적 실천에 대한 비판이 사회학적 담론 자체와 관련된다고 지적했다. 이런 것들이 사실 Rouse가 말하는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설명에 가깝다. Rouse가 타당하게 지적한 구성주의 역사관의 계몽주의적 측면은 과학사의 주제 및 방법과 과학사 자체와의 관계를 문제 삼는다. 그러나 이 문제가 중요하더라도, 과학사가 과학자 자신들의 과학 이해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러티브 연구는 둘 사이의 간극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Rouse는 과학 실천 자체가 과거의 작업들을 해석하고 중요한 가능성들을 예상하는 내러티브라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내러티브의 결합으로만 사건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 텍스트와 독자에 대한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2

 

과학자와 역사가의 서사는 서로 어긋난다. 마커스는 과학적 담론에서 만들어진 향토사가 1) 개인주의적이고 영웅적인 그림을 묘사하고, 2) 과거를 현재에 통합시켜서 현재가 과거에서 모든 가치 있는 것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기며 3) 역사에 대한 기억상실이라고 정리했다. 윌리엄 클라크는 프라이의 네 가지 내러티브 분류를 과학사에 적용하여 실제 과학사적 작업을 분석했다. 길리스피의 책과 과학자들 본인이 쓰는 향토사가 로망스에 해당하는데, 이때 과학사는 영웅의 승리를 향한 여정과 같이 서술된다. 이 이야기가 완전히 휘그주의적이지는 않으나 장애물과 실수들은 궁극적으로 목적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일 뿐이다.

트라윅은 과학자가 자신을 꾸미는 이야기가 남성적 가치를 함유하며 교육의 과정에서 구전되어 재생산된다고 말했다. 반면 현대의 과학사가는 풍자와 아이러니를 사용하여 과학자들이 멋지게 덧칠한 과거를 폭로하기를 즐긴다. 과학자는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과학사가는 불연속성을 선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과학사가 독자를 실망시키기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이러니에 익숙한 현대 독자들은 구성주의 내러티브의 복잡함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 특히 과학 실천의 불확실성과 실제 연구의 과정을 관찰하려는 독자에게는 아이러니가 필요하다. 지적 작업의 시간적 흐름에 몰입하는 와중에도 아이러니를 통해 거리를 두며 불연속성을 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홈즈는 라부아지에의 생리화학 실험실 노트를 분석할 때 이러한 서술을 사용했다. 그의 책은 라부아지에의 유명한 발견이 생리학 연구 프로그램에도 함축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연구의 복잡한 측면들을 드러냈다. 이런 과정들은 수많은 불연속성들과 그 불연속성이 출판될 수 있을 만큼 연속적인 설명으로 고쳐 쓰이는 모습까지 포함한다. 그러나 홈즈는 연구의 대상과 거리를 두는 대신 그를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고독한 탐구자의 상으로 그리려 했다.

반면 Rudwick은 데본 주 논쟁에 관한 연구에서 길고 상세한 내러티브를 채택하여 사회적 상호작용과 자연에 의한 구성을 온전히 묘사하려 시도했다. Rudwick의 연대기적 내러티브는 과학지식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상호작용을 낱낱이 보여주기 때문에 자연적 영향과 사회적 영향을 명확히 구분시켜 준다. 또한 그는 현재의 결론을 바탕으로 한 회상적인 서술을 피하기 위해 행위자가 알지 못했던 사실을 거의 쓰지 않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술 속 시간을 조절하는 소설가로의 기술, 저자의 목소리, 그리고 독자의 역할이다. 저자는 결과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세하고 독자는 이후의 전개를 알지 못하니 답답해 한다.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Rudwick은 마지막 두 챕터를 도표와 지도로 탁월하게 요약해 놓았다.

도표는 (이를테면) 개인들의 개념적 이동이 얼마나 급격히 일어나는지를 앞의 내러티브보다 확실히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논쟁의 해결이 한 쪽의 승리가 아니라 예상 못한 새로운 합의로 도출되었다는 사실이 도표 속 대립하던 선이 교차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내러티브는 논쟁이 끝나가는 시점의 모호함과 점차 안정되고 종료되는 과정을 도표보다 잘 제시한다. 데본계가 안정화되자, 그 결론은 참여자들의 역사 서술에 반영되어 과거 본인들의 입장을 재해석하고 왜곡하는 일들을 뒤따르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과학자들의 낭만적 서사가 과학사가 Rudwick에 의해 분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콜린스와 핀치는 Rudwick가 데본계를 끝까지 거부했던 학자들을 소홀히 다루는 것이 대칭성 공준을 어기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의 존재는 합의가 그만큼 경험적으로 명백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Rudwick은 이에 대해 비판자들이 명백한 증거를 거부하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동료들에게 고립된 것이라고 (따라서 시간적으로 따라가다 보면 소홀히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대답했다. 결과적으로 이루어진 합의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합의가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연대기적 서술은 일어난 일만을 상세히 보여주는 것이기에 대칭성 공준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합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야기에서 끌어낼지 남겨둘지는 역사가의 몫이다. 따라서 Rudwick이 자신의 의도와 이야기의 방향을 명확하게 밝혔다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가 구체적인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Rudwick이 내리는 결론이 논쟁적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는 경험적 증거들이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실재론이나 사회적 논쟁과 무관했다는 구성주의를 모두 거부하며, 자연은 사회적 구성의 범위를 제한한다는 모델을 내놓았다. 때문에 Rudwick에 따르면 대본계는 실재에 대한 재현일 수 있다.

피커링은 Rudwick이 화해시켰던 양 진영의 입장을 거부했다. 그가 제안한 모델은 챕터 1에서 보았듯 과학적 실천이 도구들과 인간들의 실천의 뒤엉킴이기 때문에 물질적 측면에 관여한다는 것이었다. Rudwick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피커링의 모델을 뒷받침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저자의 목소리를 내러티브 속에 넣는 것이 낫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러기 위해선 합의가 안정된 이후 시점과 혼란스러웠던 시점을 오갈 필요가 있다. 따라서 Rudwick의 엄격한 반회고적인, 결과를 잊은 채로 쓰인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자연주의적 내러티브를 버리고 서술 태도를 가지는 것은 독자의 성찰을 요구하지만, 과학적 실천의 시간성을 잘 묘사하며 안정된 지식이 혼돈 속에서 출현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과학사가는 현재를 향한 낭만주의적인 서사와 더불어 플롯화되지 않은 것으로 위장된 서사 역시 부정한다. 과학사는 시간적 경험과 무관한 실재를 그릴 수 있다는 자연주의적인 서사를 지양해야 한다. 지식을 만드는 과정은 해답과 구분들이 불명확한 상태에서 갑작스러운 명료화로 이행하기 때문에 특이한 시간성을 경험한다. 이것이 만드는 회상적인 관점과 자연주의적 관점을 벗어나서 분열되고 재조합된 시간성을 추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범주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선사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토론해 볼 문제

 

1.     글에서 보다시피 현대 과학사 서술은 거대담론, 거대서사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흐름 위에 서 있다. 거대서사는 빈 자리일 수 있을까? 글은 거대서사의 필요성을 아마추어 독자와 눈을 맞추기 위해서정도로 축소시킨다. 하지만 과학을 포함한 모든 역사는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특정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서술하는 거시적인 역사는 복잡성 때문에 어려운 것인가(크리스티), 아니면 근본적으로 허구일 뿐(Rouse)인 것인가?

 

2.     블루어는 모든 지식이 인지적인 측면과 사회적인 측면의 벡터합으로 구성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블루어가 두 원인을 서로 배타적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옹호한다. 그러나 Rouse의 비판은 고전적인 이분법 그 자체를 답습하는 것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블루어 옹호는 타당한 것일까?

 

3.     홈즈와 Rudwick은 각각 어떤 내러티브를 사용했고 장단점은 무엇이며 둘의 차이는 어떤 것인가?

 

4.     Rudwick의 반-회고적인 내러티브와 피커링이 엄격한 연대기성을 포기하고 재구성한 내러티브의 차이는 무엇인가? 저자는 자연주의적 내러티브와 작가의 태도를 드러낸 내러티브 중 후자를 선택하라고 주장한다. 그것에 동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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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에 너무 정성 들이지 말기.

책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끄집어내는 습관 갖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