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ing Natural Knowledge 6장 메모
Jan Golinski, Making Natural Knowledge
6. Culture and Construction
The Meanings of Culture
계보를 쫓는다. 민속방법론, 상징적 상호작용론, 인류학, 페미니즘, 기호학, 해체주의. 새로운 문화사는 이러한 뿌리를 두고 과학에 대한 문화연구를 시작했다. SSK를 벗어나는 수많은 연구들. 저자는 이를 테면 인류학과 페미니즘적 관점이 과학자 정체성을 구성하는가를 밝히려 했다. 이 책은 구성주의의 시작으로부터 그것 위에 세워진 역사적 연구들을 쫓았다.
윌리엄스는 문화라는 단어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기능의 역사를 추적했다. 문화는 19세기 초 영국에서부터 도덕적, 미학적 차원이 유지되었다. 특히 보수 작가들은 신생 산업사회의 특징들과 구분된 지적 활동의 기술, 그리고 그런 활동들의 도덕적 평가 기준을 지칭하는 단어로 ‘문화’를 썼다. 추상, 절대성. T. S. 엘리엇은 그걸 소생시켰다. 사회적 실재에 대한 평가 기준.
이후 스노우는 문화로의 과학기술이 물질적 웰빙을 제공함으로써 사회적 희망을 준다고 말했다. 도덕적, 미학적 가치로 가득 찬 문화로의 과학은 구체적 사회적 관계와 떨어져 있었다. 리비스는 스노우가 과학과 인간 조건에 대한 지식의 깊이에 있어 신뢰할 수 없다고 하며 반대했다. 결국 과학과 문학 사이의 깊은 골, 문학적 지식인들이 과학을 경멸한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과학이 문화에 부합하는지 서로 다른 입장이긴 했지만 둘 다 문화를 사회적 조건과 독립적인 도덕적, 미학적 가치로 보았다. 그래서 과학은 미학적, 도덕적 의미 때문에 문화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문화와 사회는 반대 개념이 아니다. 윌리엄스는 문화로서의 과학을 기호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과학의 사회적 역사적 차원, 다른 문화들과의 교류를 밝힐 것으로 보았다.
인류학도 있다. 기어츠 왈: 문화는 행동된 문서이다. 행동은 사회적 담화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민족지학자의 업무는 텍스트 연구자의 것과 유사하다: 맥락 속에서 행동이 가진 의미를 포착하는 해석의 기술 습득하기. 그럼 과학 공동체 역시 그들 활동의 의미를 포착하기 위해 접근될 수 있다. 인류학에서 ‘문화’라는 단어를 가져와 과학학에 사용한다는 것은 제한된 범위의 연구를 한다는 뜻이다.
샤론 트라윅의 연구가 중요하다. 트라윅에 따르면 현장조사 연구의 국지적 특성은 단지 한계가 아니라, 인간 활동의 시간적, 공간적 제한을 반영하고 있다. 에밀 뒤르켐이 원시적인 종교 신앙에 대해 했던 말처럼 “한 문화의 우주론은 사회적 활동의 범위에 반영된다.” 물리학자들의 경우, 지역적으로 한정된 문화에서 그것과 정반대인, 보편적이고 반문화적인 우주론이 나오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뒤르켐에 의하면 정신적 구조물이 집단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
물리학자들의 생각을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문화로 설명하는 것이 옳을까? 인류학에 영향을 받은 분석가들은 과학자들의 수가 단일한 실험실보다 대규모라고 한다. 그리고 실험적 지식의 연장에 대한 연구들은 사물까지 끌어들인 소통의 채널들로 지식이 이동한다고 주장했었다. 또한 문화는 단단하고 안정된 맥락이 아니라 과학적 실천들에 의해 변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들은 기어츠 왈 문화의 뜻을 변화시켰다. 미학적인, 삶의 진실한 측면을 가리키는 고정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집단 사이의 상호작용 자체가 문화의 정의에 필수적이다. 라투르도 문화라는 개념의 기원을 식민주의의 역사에서 찾는다. 유럽 문명이 지적 우월성을 갖는다는 가정 배격한다. 둘은 근대 서구와 다른 문화들을 나눈 원인을 다르게 지목하는데, 기어츠에겐 수집 활동이고 라투르에겐 과학이다. 그 과학 역시 수집을 지칭하고 있지만. 따라서 서구 과학 지식과 그 밖의 문화들의 차이는 주변으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과 만들 수 있는 네트워크의 크기 차이이다.
과학에 대한 문화 연구는 두 함의를 갖는다. 첫 번째로 인류학을 과학에 적용시키는 것은 비서구 문화와 서구 문화를 같은 자리에 두는 탈식민주의적 도덕을 지원한다. 두 번째로 이는 결국 위계를 재주장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 따라서 활동 범위의 크기를 이해해야 한다. 거대한 크기의 네트워크를. 그래야 과학적 지식의 국제적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Regimes of Construction
과학에 대한 문화 연구의 한계를 보았다. 문화에 대한 동질적이고 미적인 함의가 과학적 자원의 혼종적인 다양성과 확장된 환경(네트워크), 그리고 주변 문화를 재배치하는 과학적 실천의 능력을 무시한다는 것. 문제는 결국 챕터 1에서 봤던 ‘구성주의의 문제’이다.
여기선 과학적 사실과 기구를 이동하게 해주는 과학기술의 제반 시설을 본다. 라투르는 네트워크를 통해 과학기술이 재생산될 수 있게 해준다 주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도량형이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이루어진 측정이 호환성을 갖도록 하는. 라투르는 도량형을 이보다 더 넓은 의미로, 지식의 생산을 표준화시키는 물질적, 인간적 조건으로 사용한다. 우리가 자연의 균일함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은 이런 의미의 도량형이다.
도량형과 실험실 과학과의 관계 예시: 저항의 단위를 정의하려는 맥스웰과 캐번디시 연구소, 그리고 Siemens. 함의: 도량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과정이다.
카톨릭적인 성채, 인증된 표준 기구에서 칼뱅적인 개혁, 즉 재생산될 수 있는 문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포인트는: 꽤 다른 종류의 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유지될 수 있다. 기구, 작성된 글, 암묵적인 기술, 다른 장소에서 이 요소들을 견고히 하는 순환에 대한 다른 강조를 포함하는 네트워크.
이는 라투르의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도량학적 네트워크는 특권화된 장소, 단일한 근원에서 가지를 낸다. Shapin의 비판? 이런 설명은 힘에 대한 의지 같은 것으로 이른다. 보다 역사적인 뉘앙스는 유연한 모델을 필요로 한다. 네트워크 구성의 다양성. 다양한 힘의 중심의 가능성을 인지한다. 또한 테크노사이언스의 네트워크와 정치적 구조 사이의 관계를 파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