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king Natural Knowledge 3장 발제
Jan Golinski, Making Natural Knowledge
3장 The Place of Production
The Workshop of N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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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튼이 과학의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나누었던 것은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 관점에 따르면 과학의 타당성은 보편적이지만(everywhere) 그 지식의 기원이 되는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nowhere). 실험실 연구는 이 문장의 뒷부분을 겨냥한다. 서양 학문은 전통적으로 지식을 물리적 세계와 떨어져 있는 정신만이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믿음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인간사와 떨어진 고독한 장소를 찾았던 학자들의 예시로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학자들이 성공적이었다고 해서 지식이 사회와 구분된다는 말이 참이 되지는 않는다. 고독을 찾는 행위조차 문화적 관습에 근거하며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려는 목적에 종사한다.
고독 속에서 업적을 쌓은 두 과학자, 뉴턴과 다윈을 통해 이를 보자. 뉴턴은 주변 사람들이나 사회와의 관계를 전부 끊지 않았지만 자신과 자신의 작업을 고립시켰고,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표현했다. 특히 그는 연금술 연구를 비밀에 부쳤다. 연금술 텍스트들은 은밀하고 숭고한 알레고리로 고대의 비밀스런 진리를 표현했기에 천박한 화학보다 중요했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 역시 공공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이러한 신비성-천박성 구분은 뉴턴의 수학적 자연철학에도 담겨 있다. 자연에 대한 발견은 명백하게 드러나기에 실험의 증인이나 복제 같은 천박한 정밀조사는 불필요했다. 보일 실험의 객관성을 보증했던 대중은 뉴턴에게 있어서 타락의 원천일 뿐이었다. 이의 연장선에서 뉴턴의 고독은 그의 (쉽게 이해되지 않는) 수학적 연구의 조건으로 동료들에게 제시되기 위해 사용되었다.
1842년 다윈은 런던의 소란스러움에서 벗어나 켄트로 이주했고, 그것도 모자라 곧 그는 거금을 들여 집 앞 도로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고립은 사회를 벗어난 장소에서 진리를 밝혀내는 전통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정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도 수많은 동료들, 그리고 표본 수집가들과의 교류가 이어졌기에 다윈이 반사회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뉴턴과 다윈의 고립은 실용적으로나 문화적 상징으로나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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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사적 고립과 공적 전시의 기능을 동시에 함으로써 지식을 생산하는 장소이다. 방해 없이 기구와 재료를 활용하기 위한 장소라는 점에서 실험실은 사적인 공간이지만,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지식은 갇힌 공간을 벗어나 공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모호함은 근대 초부터 명백히 드러났다. 17세기에 실험실은 ‘보일러가 있는, 화학적 작업을 위한 방’으로 통용되며 연금술사들의 은밀함을 연상시키는 지하에 위치했다. 티코 브라헤는 실험실이 은폐된 장소에서 사회성이 적은 지식을 만들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왕립학회는 실험적 지식을 공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실험에 신뢰할 만한 증인을 세우는 것, ‘개방성’을 이상으로 내세우는 미술사, 무역사 편찬 등이 그 방도였다. 이로써 대중은 과학지식 생산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지만 과학을 공적 영역으로 이끌려는 시도는 두 가지 비판에 부딪혔다. 우선 홉스는 실험에 자신의 입회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실험적 지식이 열려 있다는 주장 자체에 반대했다. 또한 Stubbe는 지식 생산이 비밀적이지 않다면 그 방법 잠재적 경쟁자들에게 노출되어 지적 재산권을 위협할 것이라는 비판을 던졌다.
이러한 문제들은 개인성과 공공성의 공존이라는 딜레마에서 나온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술적 묘사나 삽화 같은 방법으로 실험실을 재현하여 그 안에서 만들어진 지식의 타당성을 공적으로 보여주려는 방안이 시도되었다. 반대로 보일이나 훅은 실험실로의 공적인 접근을 막았다. 보일은 집 안에 사회적 교류를 위한 장소를 따로 만들어 불청객의 방해를 최소화시켰고, 훅은 비록 그의 낮은 지위 때문에 자주 불려 다녔지만, 그레샴 칼리지에 있는 그의 숙소가 신사들의 체면에 맞지 않는 곳이었기에 심하지는 않았다. 보일과 훅은 모두 사회적 관습이나 물리적 장소와 같은 자원들을 활용했다. 17세기의 실험실은 공간을 이루는 물질적 재료를 재배치함으로써, 그리고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지각하는지, 그 공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포함한 문화를 활용함으로써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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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후 실험실의 역할과 특수성에 대한 인식은 널리 확산되었다. 인류학자 Traweek은 선형가속장치 연구소에서 현장조사를 한 뒤 그곳의 입장을 규제했던 요소는 시설의 보안이나 외양보다는 이방인을 거부하는 미묘한 분위기였다고 썼다. 과학적 기관에 대한 존중은 건축에서 나타나는데, 19세기 영국의 과학 시설을 연구한 Forgan은 건축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시설들이 실용적 필요와 상징적 성취, 그리고 영역 표시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제정 러시아기의 천문관측소를 연구했던 Williams, 베를린의 연방물리기술연구소를 연구한 Cahan 모두가 각 연구소들이 과학활동을 위한 편리와 외부세계에 대한 메시지(국가의 권위, 영역 주장 등)를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Forgan은 19세기 실험실의 내적 배열이 어떻게 권력의 훈육에 종사하는가를 연구했다. 실험실의 의자는 벽과 떨어져 나란히 일렬로 배열되어 있었고 강의실은 강사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의자가 반원형 꼴로 확장되는 형태였다. 하지만 리버풀 대학 칼리지는 실험실이 단식 의자와 반원형 꼴이었는데, 결국 이들 모두 중앙의 감시와 통제를 위해 설계되었다.
실험실의 물리적 공간은 인간들 사이의 작용, 즉 노동의 분화를 조직화한다. Traweek에 의하면 현대적 과학 기관에서 직원들의 지위, 역할, 그리고 무엇보다 관습과 같은 코드들은 명백히 구분되어 있다. 특히 여성에겐 덜 중요한 위치가 주어진다. 17세기에도 여성은 실험실의 진지한 작업에 허용되지 않았다. 반대로 사회적 직위가 낮았던 기술자들은 실험에 반드시 필요했지만 머리가 아닌 노동을 위한 손으로 취급되었고 실수를 할 때를 제외하면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Stuewer의 연구는 현대에도 원자 분열에 대한 논쟁이 여성 기술자의 오류로 편하게 합의된 사례가 있음을 보였다. 19세기 초에는 실험실의 노동이 산업적으로 관리되는 경향이 등장했다. Schaffer는 이때의 천문학 조수들과 ‘개인 오차’를 연구했다. 이는 개인의 반응 시간을 정량화하여 오류를 제거하는 방법으로, 관측소를 (관측자들이 윗사람에 의해 관리와 경계의 대상이 되는) 공장과 같은 시스템으로 환원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 Galison은 20세기 중반의 변화를 관찰했다. 거품 상자에서 의미 있는 관측이 적게 나온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수많은 기술자들이 반복적인 작업으로 입자 경로를 정량화된 데이터로 번역하는 시스템이 창안되었다. 중간 과정은 인력과 컴퓨터에게 일임되고 물리학자들은 결과만을 다루는 공장식 시스템이었다. 방법(실험물리학)의 변화와 도구(거품 상자)의 변화는 노동과 인간의 상호작용의 조직을 바꾸었고 인간과 기계 사이의 기술의 재분배까지도 일으켰다. 이러한 복합체의 역사는 대단히 난해하고 길지만 시도되어야 한다.
Beyond The Laboratory Wal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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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은 외부 세계와 관련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1) 실험실의 외부 지원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 2) 실험실이 의도적으로 주변의 영향에서 고립되어야 한다는 점, 3)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지식이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점 때문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한 방법은 청중 앞에서 시연하는 것이다. 이 극장은 원 실험과 같지 않다거나 시연자와 청중 사이의 특정한 관계가 필요하다는 등의 특징이 있다.
베이컨은 극장의 우상을 비판하며 대중 실험에서 비현실적으로 꾸며진 서사적 단순화와 스펙터클이 과학의 비판적 호기심을 경이로 바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왕립학회는 저급 광대처럼 되기를 경계하면서도 대중을 대상으로 한 극적인 실험을 공연했다. 18세기의 공론장에서 실험 공연은 스스로를 천박한 공연자와 구분 지은 대중 강연자들과 부끄러움 없이 오락거리를 제공한 공연자들로 나누어졌다. 자연 현상을 신비로운 것으로 표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 역시 계속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18세기 말 이후의 영국의 대중 과학은 두 부류로 나누어지게 될 압력을 받았다. 첫 부류는 노동계급까지 포함하여 더 넓어진 관중에게 펼쳐진 과학 공연이었고 두 번째 부류는 새로운 기관에서 발전된 기계들로 잠재적 후원자인 중상류층을 위해 보다 전문적인 실험을 선보인 공연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18세기의 관습을 어느 정도 이어받은 험프리 데이비의 왕립과학연구소 공연이었다. 데이비의 후계자인 패러데이는 사적 연구와 공적 시범을 명확히 나누고 둘 사이의 전이를 잘 활용했다. 자신의 연구를 시연할 때 그는 현상 스스로 말하는 듯한 자명함을 가지는 것처럼 설득시켰다. 패러데이의 샌더매니언 신앙은 사적 삶을 공공에서의 페르소나와 분리시켜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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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에서 극장으로의 모델은 전형적이지만 (예를 들어) 공적으로 지식이 만들어지는 장소 같은 경우 적용될 수 없다. 심지어 사적인 곳에서 공적인 실재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위반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박물관과 현장조사 부지이다. 박물관은 전시행위 그 자체가 자연 지식을 구성하는 장소이다. 극장이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지식을 재연하는 것임에 반해 박물관은 보여지는 것이 직접적으로 알려지는 ‘가시적 지식’의 장이라 할 수 있다.
박물관의 뿌리는 근대 초 수집가들이 이국적이고 다양한 물건들을 무질서하게 배치한 데서 시작한다. 수집가 개인의 위신과 성취를 과시하는 장으로서 근대 초 박물관은 개인적이고 남성 독점적인 곳이었지만 점차 점잖은 계급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박물관은 닫힌 스튜디오 대신 열린 갤러리에 가까워졌고, 18세기에 이르러 점잖은 계급의 여성에게까지 열렸다.
18세기에 이르러 박물관은 미셸 푸코가 자연사라고 부른 다양한 과학들의 지식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핵심에 자리잡았다. 대상은 단일한 관점에서 가시적이고 표면적인 특징만이 세밀하게 조사되었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무질서한 배열은 유사성을 근거로 한 분류와 질서로 대체되었다. 18세기 말에 자연사는 근본적인 변화를 겪지만 박물관의 중요성은 19세기까지도 계속 커져만 갔다. 이를테면 Aggasiz는 비교해부학이나 병리학과 같은 신생 학문에 박물관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한다. 박물관은 자연 세계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배열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세계를 표상하는 창이라기보다 과학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중요하게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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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연구 과학은 박물관이나 실험실과 다르게 구획된 장소로 제한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장조사 과학의 지식은 국지적으로 구성되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실험실 연구의 구성주의적 모델을 사용할 수 없더라도, 세계의 표상을 구성한다는 (실험실에서 관찰된) 실천들은 현장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실험실에서 재생산하기 위해 외부 세계의 조건들을 소우주로 구성하는 것이 한 예이다. 라투르는 현장으로의 이동이 ‘번역’을 목표로 한다고 주장한다. 넓은 공간적 범위를 포괄하는 현상의 표상을 국지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돌아오는데, 이 표상은 불변하는 이동성을 가진다, 즉 이동 가능하지만 영구한 형태로 고정된 모델로 축소되어 있다. 이렇게 멀리 있는 현상을 가까이 가져와야만 과학 지식은 세계를 함축할 수 있게 된다.
지도 제작은 공간적 관계를 다루어 넓은 공간의 국지적인 표상을 만드는 방법이다. Revel은 프랑스의 국경을 긋기 위해 발달된 지도 제작 기술을 연구했다. 중세 후기엔 국경을 알기 위해 지도가 아닌 다른 기술들이 활용되었고, 가시적 재현을 위한 방법들은 국경을 위해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지리학 발달과 풍경화 기술이 결합하자 공간적 관계가 작은 종이에 표상되는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는 원래 지도는 왕이 자신의 권력을 만끽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었지만 18세기 말에 측량 기술, 측지학, 도구 공학이 발달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의 합작으로 국경을 정교하게 그은 가시적 표상이 완성됐다. 또 지질학적 지도가 만들어진 과정을 추적했던 Rudwick은 그것이 표면으로부터 추론되는 것을 보여주려 하기에 이론적 해석을 필연적으로 함유하고 따라서 추측으로만 남는다고 주장했다.
지도 제작을 연구함으로써 우리는 현장연구 과학의 ‘번역’의 구체적 실천을 이해할 수 있다. 지도는 문맥 속에서 그 세계의 표상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드러낸다. 이를 통해서만 넓은 공간이 과학의 국지적 실천 속에서 사용될 수 있다. Ophir와 Shapin은 지식의 공간이 장소로 점유된 공간과 다른 heterotopic 공간을 nonheterotopic 공간과 구분한다. 전자는 실험실을 포함하고, 후자는 현장조사 장소를 포함한다. 라투르는 현장조사 과학 역시 번역, 표준화 등의 실험실 지식의 구성과 관련된 개념이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느슨한 실험실 정의가 다른 장소에도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실험실이 중요하지 않은 과학에도 비판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